석굴암은 일제시대 우체원에 의해 발견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엄청난 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은 대대적인 보수를 시작합니다. 


사진에 보이듯이 경주 남산의 깊은 자락 안에 있던 석굴암이 형편없이 방치된 이유는


고려시대에 불교가 워낙 득세를 하다가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불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본 


조선시대에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씁니다. 


결국 불교는 한순간에 나라를 망치는 종교라는 평가를 가지게 되고 


여러 불교문화재도 방치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지금의 석굴암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알고있는 지식으로 석굴암을 복원한다고 공사를 시작했지만 


결국 석굴암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복원하는 바람에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제시대의 보수공사

일제시대, 1912~1915년에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흙에 파묻혀 있었다. 최초의 보수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맺히게 되었다.



해방이후 보수공사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 사찰(石窟寺刹)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속에서 방치되어오다가, 1961-1963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석굴내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덧씌웠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에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 또한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2011년 현재, 입구는 유리로 봉해져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 방문자는 석굴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위키피디아 발췌>




















대한민국문화유산영상공모전-석굴암 from heritagech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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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2013년 현재의 모습입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중 석가탑에 훼손현황이 심해 201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직접적인 조사결과를 통해 불국사삼층석탑해체수리 착수를 결정하게 된다.  


본격적엔 해체 복원이 시작되어 복원은 오는 2014년에 마무리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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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전쟁포로가 부른 100년전 '아리랑'


100년 전 전쟁에 끌려간 고려인 2세가 부른 '아리랑'과 이를 녹음한 레코드판이 공개됐다.
4일 경상북도 문경시 옛길박물관에서 시작한 '길 위의 노래, 고개의 노래 아리랑'전(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기획)에는 97년 전인 1917년 두 명의 한국인이 각각 부른 두가지 아리랑과 이를 수록한 에스피(SP)판 2장이 등장했다. 아리랑연구가 김연갑씨가 올 2월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부속 자료관인 라우트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자료로, 이틀 동안 일반에 공개된 뒤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다. 
아리랑을 부른 한국인은 1차 세계대전 독-러 전투에 러시아 병사로 참전한 고려인 2세인 김 그리고리(한국이름 김홍준, 당시나이 27살)와 안 스테판(한국이름 미상, 당시 나이 29살)으로, 이들은 독일군 포로가 되어 프로이센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인 전쟁포로였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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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로 근 한달간의 클래스도조의 내용을 살펴봤다. 75%의 칭찬과 25%의 꾸중... 


무려 850개의 기록들....(이 부분은 정말 자랑하고 싶다.)


꾸중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수업방해와 그로 인한 나쁜 행동에 대한 내용이다. 


어릴적에 수우미양가라는 성적평가방식 내용이 있다. 기술식평가 방식이라 나중에 없어지지만...


그안에 들어간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라는 한자는 곱씹을만하다. 


수→빼어날 수(秀) 입니다. 

우→넉넉할 우(優) 

미→아름다울 미(美)

양→어질 양(良)

가→옳을 가(可)


글쎄... 수우미양가의 원 뜻이 전국시대꺼라는 이야기가 있어 난리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 한자를 풀이해본다면 아무리 못하는 아이에게도 옳을 가를 허용했다는 건 


살펴봐야한다 생각한다. 


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진 것을 없애기에 바빴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있는 것을 더욱 다듬어야도 다음세대에 물려줄것이 부족할 것인데...


남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는지,...


그런 생각이 많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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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라 버스를 타다.(Bus Ride)

글 : 윌리엄 밀러 그림: 존 워드

출판사 : 사계절출판사(2004)1쇄 (2011)13쇄  원작(1998)

시리즈 :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사라 버스를 타다는 1952년 미국 앨러배마주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에서 시작한 일을 동화로 만들어낸 이야기 이다. 



1955년 12월 1일 저녁 미국 앨러배마주 몽고메리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팍스(42)가 백화점 앞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다가 일어난 일이다.

 당시 남부에선 버스를 탈 때 백인들은 앞 자리부터 채워가고 흑인들은 맨 뒷자리부터 채워가는 것이 법이었다. 

즉. 법으로 흑인이 앉는 자리와 백인이 앉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강 앞에서 3분의 1 정도 자리를 백인이 앉고 뒤에서 3분의 2 정도를 흑인이 차지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또 다른 승객이 타면 흑인이 양보를 해야한다.

 누가 양보하지 않는 한 서서 가는 게 당연하지만, 

그 승객이 백인일 경우 흑인 좌석의 맨 앞줄을 비워주는 게 당시 법이었다 

 팍스는 흑인구역의 맨 앞 자리에 앉았고 뒤이어 오른 흑인 승객 3명도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 바로 앞 백인 구역 좌석도 모두 찼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서 백인 1명이 더 타자 백인 운전사는 팍스의 좌석줄을 향해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비켜주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라고 소리쳤다. 

주변 흑인 승객은 머뭇머뭇 일어났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고, 운전사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다. 

"요금을 낸 이상 난 일어날 필요가 없다"며 헌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그녀에게 법원은 벌금형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굴복하는 데 지치고 넌덜머리가 났던" 그녀는 당당히 항소했고,

 이름없는 그녀의 작은 저항과 용기가 삽시간에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모든 흑인들이 단결해 381일간에 걸친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벌인 것이다. 시 당국과 경찰의 협박과 회유, 

마구잡이 검거가 계속됐지만 흑인 사회는 때마침 이곳 교회로 온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지도 아래 줄기차게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이어갔다.

 마침내 1956년 12월21일 얼 워런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은 버스 안 인종분리 규정이 위헌이라며 팍스의 손을 들어줬다.

381일간 흑인들이 단결해 버스를 타지 않고 로자팍스의 이야기가 맞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뭉쳐서 사회를 바꿔 나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보통 이 이야기를 인종차별과 다문화의 경우로 해석하고는 하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대다수의 애매함을 따라가는 현실에 대해

꼬집어 보는 소수의 구체적 의견을 귀기울이는 이야기로 보았으면 한다. 

누구든 작은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힌트를 얻게 된다. 

그 작은 이야기에서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의 큰 멜팅팟(Melting Pot)의 용광로를 만들어 냈듯

우리 사회도 다수의 애매함을 따라가는 체계가 우리자체를 레밍즈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소수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는

생각하는 인류학적 인간으로 만들어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교사부터 그런 아이들을 만들어 봐야 한다. 


 



책의 구성은 로자팍스의 이야기를 사라라는 아이로 풀어 썼기 때문에 아이들이 읽기에 참 좋다. 

그러나 맨 뒤에라도 로자팍스의 이야기와 그 이후의 이야기 그리고 개정판을 내서라도 지금 오바마가 로자팍스가 앉았던 

몽고메리 버스에 앉아있던 사진이라도 넣어주었으면 한다. 


작은 예술사진 하나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 





로자팍스의 장례식을 보면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이 

그녀가 없었더다면 자신이 이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의례이 하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그가 했던 작은 용기가 큰 일로 만들어지게 되고

소수의 의견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수긍하고 힘을 가질때 그 사회는 건강해진다. 





개정판에 이사진만 실어주면 나는 이 책을 사고 싶다. 

미국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나는 물건은 독일... 나라는 프랑스가 좋더라...)

그들이 가진 자신만의 건전성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자신의 실패를 다시 곱씹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힘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그곳을 살펴보며 그가 느꼈을 생각을 다시한번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생각해보며 사진을 남길때

저사회가 더욱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미시건 주의 디어본, 헨리 포드 박물관에 소장된 로자 팍스가 탔던 버스에 앉아 있는 오바마 대통령... 


로자팍스가 앉은 자리에서 기대어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품평...

책질 좋다.

일러스트 좋다. 

구입? 개정판에 저 사진만 넣어주면 난 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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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건 주의 디어본에 소재한 헨리 포드 박물관에 소장된 흑인 아줌마 로자 팍스가 탔던 버스에 앉아 있는 오바마 대통령...


2012년 4월 18일의 사진이다.


로자팍스의 이야기는 사라 버스를 타다의 이야기로 5학년 읽기 책에 실렸다. 


인종차별의 문제보다 예전부터 그랬기 때문에 계속 따라하는 다수의 애매함을 따라하는 현실을 


꼬집어 보는 소수의 구체적 의견을 귀기울이는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몽고메리 버스(No.2857)

로자팍스의 모습...


로자팍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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