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기고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도 기뻐할 수 없었던

슬픔이 가득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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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이 저 거대한 땅을 한꺼번에 정복하게 된 이야기가 

상인 40명이 죽게 되면서 일어난 전쟁이라는게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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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의 발달과 매체의 영향으로  놀이 방법도 표준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문화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느데 다른 것들은 얼마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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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파병된 터키군들은 15000명.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였습니다. 





이 중에서 720명정도가 한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당시 길잃은 꼬마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터키로 데려오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60년. 그에게 딸이나 마찬가지였던 아일라를





지금까지 애타게 찾는것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제작진은 주한터키대사관으로 찾아갑니다. 





당시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백상기 고문. 











'안카라학원'은 터키군이 세운 어린이 보육시설이었습니다. 





휴전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켰고, 





슐레이만부대가 철수하면서 아일라를 맡긴곳도 이 곳 안카라학원이었습니다. 





안카라학원에서 배우고 자란 이들은 지금도 모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형제회라고 합니다. 






지금 안카라학원이 있던 자리는 관공소가 들어서고 새롭게 정비되어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만큼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드디어 찾은 아일라. 





이제 예순이 넘은 아일라도 이제는 할머니. 











안카라학원을 나오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아일라에게 지금 가족이란 아들과 손자두명이 전부라고 합니다.





그런 아일라에게 제작진이 드디어 찾아갑니다. 









지난 4월 한국은 서른여명의 한국전 터키참전용사들을 초청했습니다. 





슐레이만부부도 함께 초청받아서 한국에 왔습니다.





이 곳에는 462구의 터키군전사자들 시신이 안치되어있습니다. 

















'열쇠같은 이름 아일라. 





친근한 목소리로 아일라하고 깨우면 가장 따뜻했던 날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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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역사스페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이후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을 세우고

그 대한제국이 한양을 개조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시절의 기록을 통해 개화기 시절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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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비공개 카페에 있던 파일입니다. 

 백범일지에 나타나있듯이 영원히 살기 위해 이 일을 하겠다는 의연한 청년 윤봉길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본을 떨게 할 수 있었던 독립운동을 해낸 민족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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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족 보행 로봇으로 보스톤 다이나믹스가 만든 PETMAN은

미국 군사 요원에 의해 사용되는 특별한 의복을 테스트하기 위해 개발한  로봇이다.

몸의 생리를 표현하는 정도로 발전하여서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며 

반응하는 속도도 빠른 2족 보행로봇이다. 

앞으로 무기를 든 터미네이터를 볼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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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세계 인구가 70억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가 조금 어렵지만  

어떻게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는가를 쉽게 나타낸 자료로 한번 보기만 해도 이해가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눈이 즐거운 구성으로 되어 있으니 한번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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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벌써 이런 모습의 작업용 로봇을 만들었네요. 

중간에 간간히 보이는 200lbs의 쇠로 만든 관은 200파운드라는 단위로 90kg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팔이 90킬로그램씩 두개의 관을 엮어 조립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 사람이 한다면 적어도 6명 이상의 사람들이 낑낑대며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작업로봇이 쉽게 해결하는 군요.

기술의 발달에 대한 수업을 할때 예시자료로 제시할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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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기록을 보면 인플레 전에 엽전(상평통보) 1개(한푼, 한닢)의 가치는 지금 가치의 3000원 전후로 보입니다.

국밥이 엽전 2푼이었다고 하니 지금 물가와 비교해 보면 1닢의 가치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국 상인들의 횡포와 화폐정책의 부재로 당시 조선 화폐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는데요.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의 특파원 로버트 던의 기록에 의하면

미화 1센트가 엽전 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1달러짜리 커피 한잔을 마신다면 엽전 한짐을 내고 먹어야한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조선시대 19세기 말
미국기자가 생활비로 쓰려고 150달러를 엽전으로 환전한 양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이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 동전은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던 기자가 사용할 취재경비였다.


던은 한국 화폐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일본인 통역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저녁 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 더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다(콜리어스, 1904.6.4.).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은 거두어들이고 동전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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