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기록을 보면 인플레 전에 엽전(상평통보) 1개(한푼, 한닢)의 가치는 지금 가치의 3000원 전후로 보입니다.
국밥이 엽전 2푼이었다고 하니 지금 물가와 비교해 보면 1닢의 가치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국 상인들의 횡포와 화폐정책의 부재로 당시 조선 화폐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는데요.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의 특파원 로버트 던의 기록에 의하면
미화 1센트가 엽전 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1달러짜리 커피 한잔을 마신다면 엽전 한짐을 내고 먹어야한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조선시대 19세기 말
미국기자가 생활비로 쓰려고 150달러를 엽전으로 환전한 양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이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 동전은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던 기자가 사용할 취재경비였다.
던은 한국 화폐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일본인 통역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저녁 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 더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다(콜리어스, 1904.6.4.).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은 거두어들이고 동전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