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6일 동아일보 신문
타이틀 : 괴뢰군돌연남침을 기도 38선전역에 비상사태 전예국군 적을 요격중
본문 :
괴뢰군돌연남침을 기도
38선전역에 비상사태
정예국군 적을 요격중
국군방위태세만전
적의 신경전에 동요 말라
작이십오일 새벽 오시 로 부터 아침 팔시 사이에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삼팔선일대에 걸쳐 북한괴뇌집단인민군 은 돌연 남침을 기도 하여왔으므로
우리 정예국군장병은 즉시 요격중에 있다. 그런데 국방부정훈국장 이선근대령은 동전투상황과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 이십오일 조효 오시 부터 팔시 이사 삼팔선전역에 걸쳐 이북 괴리집단은 대거하여
불법남침하고 있다. 즉 옹진전면으로부터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지 전면의
괴뇌집단은 거의 동일한 시각에 행동을 개시하여 남침하여왔고
선척을 이용하여 상륙을 계획하였으므로 목하전기각지역의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요격하여
긴급적절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기중 동두천 방면 전투에서는 적측이 전차 까지 출동시켜 내습하였으나 아군대전차포에 격파당하고 말았다.
금차 이들의 무모한 내습은 제2차 총선거 이래 대내대외하여 가일층융성발전 되는 우리 대한민국을
침해 파괴 함 으로써 괴뇌집단자가의 배세를 만회하려는 의도 아래 소위 조통 을 통하여
화평통일이니 남북협상이니를 모략방송 하다가 하등의 반향도 없으므로 초조한끝에 감행하게된
공산도배의 상투수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전과는 추후발표 할것이며
어떤 모략선전에도 속지말고 군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
중략
전 국민은 우리 국군장병을 의뢰(신뢰)하며 미동도 하지말고 각자의 직장에서 만단의 태세로 군의 행동과
작전에 적극협력하기바라는 바이다.
군에서는 명령이 없어 삼팔선을 넘어 공세작전을 취할 수 없는 고충이 있으나 만전의 방위태세로
저들이 불법남침할때 이를 포착섬멸 할 수 있는 준비와 태세가 구비되었으니
전 국민은 안심하고 국부적 전황에 특히 동요되지말라.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야 추호라도 후방의 치안이나
민심을 교란하는 자가 있다면 이 또한 엄중히 단속 할것이니
각계각층 에서 군 의도에 적극협력하기를 부탁한다.
'한국전쟁'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4.10.21 1950년 6월 25일 신문내용
- 2012.07.03 우리 역사 최악의 4대 전투
- 2012.06.26 625 때 미군이 찍은 한국전쟁사진
- 2012.06.20 전세계 2곳에만 있는 특수부대
- 2012.05.20 역사에 기록된 군대의 진격속도
- 2011.12.03 6.25 전쟁 당시 터키군과 한 소녀 이야기
칠천량해전
원균의 169척 수군함대 vs 가토, 와키자카 연합의 140척 연합함대
=원균의 무능한 지휘로인해, 계속되는 소규모 해전패배로 인해
조선수군 157척 전파, 12척 도주 / 일본수군= 12척 전파
이순신이 땀노력피흘리며 고생해서 모은 수군함대를, 같은 원균이 무능함을 발휘해 모두 전멸당함.
만약 이 전투를 이순신이 지휘했다면, 임진왜란이 초기에 끝났었을지도 모른다.
쌍룡전투
청나라 기병대 300 vs 조선 총병대 40000
=청나라 300기병의 기습으로인해 조선 총병대 대열이깨지고, 자기들끼리 밟아죽이는 사태가 발생.
조선군2만전멸, 2만 도주, - > 조선항복. 삼전도의 굴욕
만약 이 어이없는 전투에서 이겼다면, 인조를 구하고 삼전도의 굴욕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용인전투
정확히 따지면 관군1만명과 농민군4만명, 개같은 관군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죄다 도망가고, 나머지 농민군들만 싸우다 대부분 전사.
현리전투
한국전쟁 당시 파병된 터키군들은 15000명.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였습니다.
이 중에서 720명정도가 한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당시 길잃은 꼬마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터키로 데려오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60년. 그에게 딸이나 마찬가지였던 아일라를
지금까지 애타게 찾는것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제작진은 주한터키대사관으로 찾아갑니다.
당시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백상기 고문.
'안카라학원'은 터키군이 세운 어린이 보육시설이었습니다.
휴전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켰고,
슐레이만부대가 철수하면서 아일라를 맡긴곳도 이 곳 안카라학원이었습니다.
안카라학원에서 배우고 자란 이들은 지금도 모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형제회라고 합니다.
지금 안카라학원이 있던 자리는 관공소가 들어서고 새롭게 정비되어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만큼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드디어 찾은 아일라.
이제 예순이 넘은 아일라도 이제는 할머니.
안카라학원을 나오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아일라에게 지금 가족이란 아들과 손자두명이 전부라고 합니다.
그런 아일라에게 제작진이 드디어 찾아갑니다.
지난 4월 한국은 서른여명의 한국전 터키참전용사들을 초청했습니다.
슐레이만부부도 함께 초청받아서 한국에 왔습니다.
이 곳에는 462구의 터키군전사자들 시신이 안치되어있습니다.
'열쇠같은 이름 아일라.
친근한 목소리로 아일라하고 깨우면 가장 따뜻했던 날들로 돌아간다.'